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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조은정
subject 박헌열 <색시공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박헌열 전시리뷰
<색시공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10.3~9 노암갤러리



                                                                                                                                       글 : 조은정 - 독립큐레이터

넓은 바다 속을 통째로 소유하는 동시에 무소유도 하고 있는 유영하는 한 마리의 물고기가 있다. 그 물고기는 어느덧 군집에 포함되어 대단위의 무리 속에 숨어들어 갔으며, 그 속에서 자유롭게 그들의 일상을 보내게 된다. 이 모습은 우리가 바라보는 바다 속의 집단 세계의 모습이었다. 바다 속 존재들이 바라본 땅위에 있는 우리의 현상과 작가가 바라 본 인간이 찰라적 존재를 위한 번뇌의 모양새는 왠지 모르게 닮아 있다는 느낌이다. 예전에 작가와 나누었던 대화중에 무척 인상 깊게 들렸던 이야기가 있다. 예술가는 작업실이 있어야 하기에 그것을 지을 땅은 필요하지만 그 이상을 뭐가 필요하겠냐는 말이었다. 저 앞에 보이는 것이 내 것이다 생각하면 내 것이 되는 것이지. 마음으로 소유하고 마음으로 위안하고 버리는 것을 알아가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라고 했던 것이 기억난다.
늘 고요하기만 하는 물고기들의 일상도 자신들만의 고군분투와 다툼이 있을 것이지만 그들의 구획 쟁탈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칭하는 우리 인간이 보기엔 그 어떤 문제도 야기되지 않는다. 이 말은 그것으로 인해 번뇌와 고통에 사로잡힐 문제는 아닐 거란 것이다. 제시한 말들과 비교 사례가 적합하지 않은 괴리감이 들 수도 있겠지만 바로 그러한 시선이 작가가 바라본 인간이 사는 현실의 모습일거란 조소어린 관점이다. 누구나 초월자가 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지 않은가. 책을 통하거나 운동을 통하거나 기도를 행하는 등 번뇌를 소멸시킬 다양한 꺼리를 찾아 헤맨다. 여기서 초월자는 결코 ‘신’이란 절대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의 번민을 치유하길 바라는 모든 인간을 의미하게 된다.
그는 이번 전시를 통해 초월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현실과 괴리된 이상의 모습을 내면에서 도출해내 듯 투영하고 있다. 물체의 그림자를 어떤 물체 위에 비추는 일이란 사전적 의미의 투영이란 의미는 의식안의 내면에서 야기되는 것들을 타자의 시선으로 보게 된 것과 일치되고 있다. 타자는 일반적인 객체인 관객의 입장이 아니라 작가 자신이 바라보는 입장에서 작품을 형상화 했다는 점이 한층 더 몰입되는 감상의 사고를 야기한다.
예술가는 자신의 관점을 작품으로 만든다. 구상적인 형태이든 추상적인 형태이든지간에 나아가 요즘 유행하는 인기 있는 현대미술의 다양한 재료적인 특성에서도 주인의 특성이 보인다. 자신을 찍은 사진을 일방적으로 바라보듯 자화상의 내면을 담은 일차원적인 전달방식과 비교해 볼 정상의 인간에서 왜곡되어 변형된 형태로 표현된 모습은 마치 엑스레이 필름과도 같은 투시된 이상의 분열을 현실에서 자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작품과 작가 모두 이차원적인 전달방식으로 분열과 교감을 반복하게 되며, 작가는 이미 작품에서 분리되어 타자의 관점에서 자신을 보게 되는 논리이다. 원형의 지지대를 딛고 서있는 한사람의 발이 보인다. 위로 그 사람의 다리가 있지만 팔은 어느덧 세 개이다. 삼각형의 모양으로 붙어있는 사람은 완벽한 형태의 두상을 각기 지닌 세 사람의 머리로 분리되어 있다. 형태는 본질에서 기이하게 변형되었지만 그 모습이 결코 생소하거나 이질적이지만은 않은 것은 인간의 정상적인 모습이 단지 내부의 분열에 포장된 외형이었음을 적나라하게 시사하고 있다.
자신조차도 스스로를 보길 거부하여 눈을 가리고 있는 탄력 없이 겹쳐진 그로테스크한 형상의 여체와 완벽한 구리 빛 탄력을 지닌 브론즈 여인 역시 동일체이다. 아마도 그녀는 영원히 아름다움을 지니고자 하는 영생을 꿈꾸는 것 같아 보인다. 한때의 아름다운 시절의 모습을 영원히 갖고자 시간을 정지시킴을 본다. 문득 예전에 보았던 블랙 코메디 <죽어야 사는 여자>가 떠오른다. 메릴 스트립의 아름다움에 대한 영원한 욕망은 묘약을 먹음으로 스토리가 전개 되어간다. 결국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마음속에선 영원할 수 있다는 현실을 반영하며 헛된 이상의 욕망을 찾던 자들은 추악한 종말을 보인다.
현실과 이상은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것 같다. 현실이 이상이 되어 만족을 느끼면 그 현실에서 또 다른 이상이 생길 것이다. 결국 이상은 욕망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욕망이 살아가는 희망을 주기도 한다. 욕망을 조절하지 못해 사람들은 번뇌하고 고통을 안고 산다. 여러 가지 욕심은 이상 속에서 선함의 양면성을 지닌다. 그 이면에서 선함과 악함의 이분법으로 나누고 또 나누어 고민하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절제하고 자제 하고자 하는 모습이 바로 고통이랑 동일시된다. 욕심이 없었다면 고통도 없었을까.
고통과 고뇌가 있기에 치유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아마 욕심과 욕망이 있기에 고통도 당연히 감수해야할 문제인 것이다. 태초에 인간이 지은 사소한 욕심에서 비롯된 것처럼 말이다.
아주 하찮은 문제라도 누구에게나 번뇌는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게 되는데 그것은 그 사람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강약에 비례되게 주어진다고 본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치를 느끼기 위해 점점 더 도달점을 높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잠시 멈추어 보자.
그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매일 버리기 위해 산다고 한다. 그것은 욕심을 버리는 연습이고 실천일 것이다. 버리기 위해 사는 것이 어쩌면 삶의 고통을 조금은 줄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색시공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시리즈에서 보여주듯 허무한 욕망의 대상에서 집착을 버리면 번뇌에서 탈출된 행복은 올 수 있을까. <게이샤의 추억>에 나오는 “그 또한 행복이 아니겠는가 ”라는 마지막 대사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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